이집트(Egypt)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여행가였던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 묘사한 바 있으며, 예수의 탄생 훨씬 이전부터 여행가들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고대 룩소르, 나일 강 등 이집트의 이미지에 매력을 느꼈다. 파라오, 그리스, 로마, 아랍, 터키, 영국이 모두 이집트를 지배했었고, 그들의 모든 유산과 이슬람 그리고 20세기 문명이 혼합되어 오늘날의 이집트가 되었다.

 파라오 시대의 폐허 옆에 서 있는 진흙 벽돌 마을은 강철과 석재, 유리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베두인족은 염소가죽으로 만든 텐트에서 살고, 농부들은 아직도 조상들이 쓰던 단순한 도구로 토지를 경작한다. 도시에서도 길고 늘어지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리복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도 있다. 또 자동차와 당나귀가 끄는 짐마차와 함께 어슬렁거리는 염소도 도로를 활보한다. 이러한 대조가 카이로보다 더 다채롭게 드러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카이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자동차 경적 소리,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카세트라디오 소리, 신자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무에진(muezzin)소리로 항상 귀가 멍멍하다. 그러나 이집트가 혼란스럽고 떠들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는 다이버들이 꿈꾸는 나라이기도 하고, 사막을 가로질러 조용히 낙타를 몰고 가는 대상과, 나일강을 따라 여유롭게 내려가는 긴 너벅선이 지나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이집트 지도(13K)

 

 

 

통계 자료

국명: 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면적: 1,001,449 sq km
인구: 62,359,623 명
수도: 카이로(Cairo)
인종: 베르베르 족(Berbers), 베두인 족(Bedouins), 누비아 족(Nubians)
언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90% , 기독교 7%
정치 체제: 민주주의
대통령: 모하메드 호스니 무바라크 (Mohammed Hosni Mubarak)

 

지리 및 기후

 아프리카 북동부 구석의 거대한 사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는 백만 평방미터 이상의 면적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국토의 99%이상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므로, 인구의 99%가 전 국토의 3%에 해당되는 지역, 즉 비옥한 나일강 계곡과 나일강 삼각주에 밀집해 있다.
 이집트 국경은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수단, 북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홍해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수에즈운하의 동쪽 지역은 시나이(Sinai) 반도로, 캐서린 산 (2642m의 Gebel Kathrina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과 시나이 산을 비롯한 산맥으로 비탈진 지역이다. 이집트 지중해 해안을 따라가면 수많은 백사장이 있고 그 중 몇몇은 리조트로 개발되었지만 대부분이 아직도 원시의 모습 그대로 고립된 채이다. 카이로 북쪽에서 나일강은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동물 대부분은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멸종되었다. 표범, 치타, 오릭스 영양, 하이에나가 사라졌고 가젤영양도 두 세 종류만 남아 있다. 설치류와 박쥐도 많지만 길들여진 낙타와 당나귀가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동물이다. 430여종의 조류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이집트에서 생육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유럽에서 남아프리카로 해마다 오가는 철새들이 많다. 200만에 달하는 새들이 해마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이집트로 날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34종의 뱀이 있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뱀이 코브라이며, 전갈도 이집트 전역에 많지만 야행성이라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홍해에는 상어, 가오리, 거북, 돌고래, 다양한 색깔의 산호, 해면, 불가사리 및 여러 종의 연체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집트 날씨는 연중 대부분 덥고 건조하다. 12월, 1월, 2월의 겨울동안 일일 평균 기온은 지중해 연안에서는 섭씨 20도 정도(화씨 68도 전후), 아스완(Aswan)에서는 기분 좋은 섭씨 26도(화씨 80도) 정도이다. 최고 온도는, 지중해 연안이 섭씨 31도(화씨 88도), 아스완은 섭씨 50도(화씨 122도)까지 오른다. 겨울밤이면 섭씨 8도까지 내려가는데 이집트 기준에서는 아주 추운 날씨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1년에 19cm정도 내리고, 아스완은 연 강수량이 2mm로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다. 3월에서 4월에는 서부 사막으로부터 캠신(khamsin) 열풍이 시간당 150km까지 올라가는 속도로 분다.

 

역사

 이집트 역사는 나일강과 뒤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일강은 그 지역에 처음 사람이 정착했을 때부터 경제, 사회, 정치,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어 왔다. 나일강 주변에 초기 공동체가 생겨나면서 맹렬하게 독립을 추구한 공동체도 많았고 작은 왕국들도 생겨났다. 결국 이 모두는 두 개의 나라로 정리되었는데, 한 나라는 나일강 삼각주까지 이르는 계곡을 차지했고 또 다른 나라는 나일강 삼각주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5000여년 전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메네스(Menes)왕의 치세에 통일되어 최초로 안정적인 왕조가 확립되었다. 그 후 2700년간 50명 이상의 파라오와 30여개의 왕조가 명멸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한 후부터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강력했던 파라오 시대를 입증하는 유물들, 즉 피라미드, 사원, 공공건물 및 예술작품 등에도 불구하고 파라오 시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가 다스렸던 사회는 계급 구분이 아주 엄격했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그후 500년간 파라오의 권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사원과 피라미드도 점점 더 웅장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군주의 권력은 제4왕조 시기에 극치를 이루었고 케오프스(Cheops) 왕, 케프렌(Chepren) 왕, 미세리누스(Mycerinus) 왕은 기자(Giza)에 세 개의 大 피라미드를 세웠다. 제 6왕조와 제 7왕조 시기(기원전 2490년에서 2330년 경)에 권력이 분산되어 작은 공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 현재의 Beni Suef 근처)에 제2의 수도가 세워졌고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집트는 내란에 빠져들었다.
 테베(Thebes, 오늘날의 Luxor)에 독립된 왕국이 세워졌고 메투호텝(Metuhotep) 2세의 치하에서 이집트는 다시 파라오 한 사람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음 250년 동안 이집트는 번영을 누렸지만 귀족과 장관들은 다시 분열을 일으켰다. 제국은 약해졌고 이집트는 외부 세력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힉소스(Hyksos)족이 북동쪽으로부터 침략해 왔고 1세기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음 400년 동안(기원전 1550년에서 1150년) 투트모시스(Tuthmosis) 1세를 비롯한 여러 통치자 아래에서 신왕국이 번영했다. 투트모시스 1세는 왕가의 계곡에 묻힌 최초의 파라오였으며, 그의 딸 핫셉수트(Hatshepsut)는 이집트의 몇 안되는 여왕 중 한 사람이다. 투트모시스 3세는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제국을 서아시아까지 확장했다.
 아메노피스 4세는 사제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는 아텐(Aten)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아크헤나텐(Akhenaten)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크헤나텐과 그 아내 네페르티티(Nefertiti)는 아크헤타텐(Akhetaten)이라는 이름의 새 수도를 건설하여 이 도시를 새로운 유일신에게 바쳤다(아마도 조직적인 일신교의 형태가 최초로 나타난 경우였을 것이다).
 아크헤나텐의 사위인 투탄카문(Tutankhamun)은 9년간 이집트를 다스리다가 어린 10대의 나이로 죽었다. 그 후 이집트는 장군들, 즉 람세스(Ramses) 1,2,3세와 세티(Seti) 1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들은 웅장한 기념비와 사원을 세웠지만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332년 그리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했을 때는 혼란 속에 있었다. 알렉산더는 새 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정했다. 프톨레미(Ptolemy) 1세의 치하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대도시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3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지만 그들의 통치 시기는 귀족들간의 적대감이 치열한 골치 아픈 시기였으며 많은 이들이 추방되거나 암살당했다.  
 그 동안 확장일로에 있었던 로마 제국은 드디어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마의 한 무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51년에서 48년까지 이집트는 프톨레미 8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8세에 의해 함께 다스려지고 있었고,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는 라이벌인 폼페이(Pompei)를 로마에서 이집트로 보내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프톨레미 8세는 폼페이를 살해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추방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이집트로 와서 프톨레미를 나일강에 던져버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미 9세를 지명하여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로 만들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 되었다. 기원전 47년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아들을 낳았으며 2년 후 남동생 프톨레미 9세를 죽였다. 시저도 다음 해 암살되었다. 마크 안토니(Marc Antony)가 로마에서 이집트로 왔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10년을 함께 지냈고 화가 난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와 담판을 짓기 위해 옥타비안(Octavian)을 보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로마 측에 붙들리기 전 자살했고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3,4세기에 들어서 로마 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외부 세력이 다시 이집트를 침략했다. 남부에서는 누비아인들이, 서부에서는 북아프리카인들이 들어왔다. 나중에는 페르시아인들도 침입했다. 이러한 전쟁과 심각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령 이집트는, 기원후 640년 아랍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집트에 이슬람교를 도입하고 불안정한 정부가 위치할 곳으로 푸스타트(Fustat, 오늘날 카이로의 위치)를 건설했다.  결국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것은 파티마 왕조(Fatimids)였고, 가와르(Gawar)라고 불리는 그리스인 알 무이즈(Al-Muizz) 통치하에 알 카히라(Al-Qahira, 카이로) 시가 세워졌다. 파티마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는 융성했고 카이로는 번영하는 대도시가 되어 10층이 넘는 건물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은 11세기의 십자군 전쟁으로 팔레스타인과, 약해져가던 파티마 왕조의 나머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시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셀주크 왕조(Seljuks)는 이집트에 군대를 파견했고 살라 앗 딘(Salah ad-Din, Saladin)은 이집트에 아유비드(Ayyubid) 왕조를 세워 카이로를 요새화하였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을 몰아내었다. 살라 앗 딘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맘루크족(Mamluks, 터키 용병)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맘루크족은 아유비드 왕조를 전복시켜 이집트가 터키로 넘어간 1517년까지 2세기 반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맘루크 족 대부분이 터키계였으므로 콘스탄티노플의 터키 제국 술탄은, 맘루크족에게 대부분 이집트 통치를 맡기고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은 1798년 나폴레옹 침략 때까지 계속되었다. 1801년 영국이 나폴레옹에게서 이집트를 빼앗았고 결국 영국인들도 모하메드 알리(Mohammed Ali)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그는 터키군의 알바니아 분견대 부관이었다. 알리가 1848년 죽자 그의 손자 압바스(Abbas)가 뒤를 이었다. 압바스는 아들 사이드 파샤(Said Pasha)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는 수에즈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에즈운하는 1869년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에 의해 개통되었다.
 이집트가 국가 채무에 시달리게 되자 1879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감사관들이 오게 되었고, 영국은 이집트에 대한 터키의 종주권을 종결시켰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이집트는 연합국 측에 섰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국가 정치 정당(Wafd)의 설립을 허용했다. 파드(Fuad) 1세가 입헌군주국의 수장으로 뽑혔고 그후 30년 동안 영국, 군주파, Wafd당이 권력을 획책했다. 2차대전 후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 국가 7개국이 아랍 연맹(Arab League)을 창설했지만, 전쟁은 이집트를 유혈 속으로 몰아넣었고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패배함으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대령이 이끄는 반체제 장교집단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통치권을 포기하지 못해 결국 이집트를 침공했다. 미국과 소련이 같은 편에 섰고 유엔이 평화군을 배치해 침입자들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세르는 영웅이 되었고 특히 아랍국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나세르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이집트, 시리아, 예멘, 나중에는 이라크까지 모두 통합하려 시도했고 아랍의 협동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악마 취급했다. 몇 달간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긴장이 격화된 후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해 6일전쟁(Six Day War)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을 궤멸시키고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수에즈운하를 폐쇄했다(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는 골란 하이츠(Golan Heights)를, 요르단으로부터는 웨스트 뱅크(West Bank)를 빼앗았다).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가 권력을 물려받았고 서방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3일 사다트는 시나이의 이스라엘 점령군을 갑자기 공격했는데 이 전쟁에서도 이집트가 패하기는 했지만 휴전 협약으로 수에즈운하의 동쪽 제방 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77년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캠프 데이빗(Camp David) 협약을 이끌어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서 물러나는데 동의했고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권리를 인정했으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랍세계의 많은 이들이 사다트의 배반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사다트는 1981년 10월 6일 암살되고 말았다.
 사다트의 죽음 이후 사다트의 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이집트의 지도자 역할을 해 왔다. 무바라크는 불안한 지역에서의 재치있는 정치 기술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다른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도 향상시켰다. 아랍 세계에서 원리주의가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무바라크의 위치는 때로 대단히 위험해졌고 그는 여러 가지로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걸프전이 일어나자 무바라크는 이라크에 대항해 3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걸프전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아랍이 싸운 것으로 보이지만, 이집트의 참전은 이집트와 서구 국가 관계를 향상시키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
 1992년과 93년, 회교 원리주의자들은 관광객들과 이집트 비밀 경찰을 대상으로 폭력 및 협박의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 집단은 정부를 전복시키고, 1996년 유엔 복부를 폭파하려는 계획으로 미국 감옥에 수감 중인 세이크 오마르 압델 라흐만(Sheikh Omar Abdel     Rahman)을 석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주의사항' 항목을 참고할 것.

 

경제

국내총생산: US$ 370억
1인당 국내 총생산: US$658
연성장률: 3%
인플레이션: 16%
주요 생산품: 석유, 천연가스, 관광, 농업(특히 목화)
주요 교역국: 미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문화

 대부분 이집트인의 삶과 생활 방식은 수백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20세기는 확실히 코카콜라, 리바이스 청바지, TV등의 형태로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대부분의 펠라힌(fellahin, 시골 농민)들의 현재 생활은 이전 수백년간의 생활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대부분 이집트인 사이에서 두드러진 태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거의 숙명론자적인 인생관이 지배적이며 이는, 수천년간 역병, 기근, 침략, 홍수에 시달린 끝에 정형화된 태도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이집트인들에게 삶이란 그들 이전의 여러 세대동안 지속되어 온 환경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회화는 기원전 24세기 사카라(Saqqara)에 있는 우나스(Unas) 왕 피라미드에 최초로 서툰 그림이 그려진 것을 시작으로 이집트인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무덤 내부를 내세와 부활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로 장식하는데 특히 민감했던 이들은 신왕국의 파라오들이었다. 현대 이집트 회화는 서구 예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금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집트 화가들은 이러한 서구 영향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잘 알려진 현대 화가로는 가즈비아 세리(Gazbia Serri), 인지 에플라툰(Inji Eflatoun), 압델 와합 모르시(Abdel Wahab Morsi), 아델 엘-시위(Adel el-Siwi), 와힙 나세르(Wahib Nasser)등이 있다.
 이집트에서 대중음악이라고 하면 최근까지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집트의 어머니' 옴 콜트훔(Om Kolthum)의 목소리를 의미했다. 콜트훔은 1975년 죽었지만 그녀의 음악과 전설은 여전히 살아있고, 시와 오페레타에 기반한 그녀의 노래는 서구인들의 귀에도 가장 친숙한 이집트 음악이다. 다른 유명 가수로는 압델 할림 알-하페즈(Abdel Halim al-Hafez)와 모하메드 아브드 엘-와하압(Mohammed Abd el-Wahaab)이 있다. 서구 팝 음악의 영향이 현대 이집트 음악에 점점 흡수되었고 이헵 터픽(Iheb Tawfik), 모하메드 푸아드(Mohammed Fouad), 하킴(Hakim) 등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자들도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가 벨리 댄스(배꼽춤)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몸을 흔들며 춤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스럽게 생각되며 성적 난잡함의 표시로 여겨진다. 리조트나 관광객용 호텔에서 공연되는 벨리 댄스 쇼의 무희 대부분은 사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인데, 아랍 여성에게 있어 그렇게 도발적인 행동은 적절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피피 아브두(Fifi Abdou)같은 이집트 무희는 회교도들의 엄청난 경멸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다. 그러나 결혼식이나 개인파티 등 대규모 가족 모임에서 춤은 일종의 오락이 된다.
 나귑 마푸즈(Naguib Mahfouz)는 1988년 '카이로 삼부작(The Cairo Trilogy)'으로 노벨 문학상을 탔고 40편 이상의 소설과 3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 그의 1956년 작품인 '거리의 아이들(Children of the Alley)'은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금서이며 많은 이들이 그 책을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있다(1995년 83세의 노작가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는 그 책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저명한 작가로는 터픽 알-하킴(Tawfiq al-Hakim), 야흐야 하키(Yahya Haqqi), 유수프 이드리스(Yusuf Idris) 등이 있다. 마푸즈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유명한 작가로는 나왈 엘-사다위(Nawal El-Saadawi)가 떠오르지만 그녀는 고국에서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감이 있다. 엘-사와디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제로 지점(Point Zero)", "이만의 몰락(The Fall of Iman, 이집트에서는 금서)", "前 장관의  죽음(Death of an ex-Minister)" 등이 있다.

 

 

 축제 및 행사

 이슬람(혹은 Hjira) 달력은 그레고리안(서구) 달력보다 11일이 짧으므로 공공 휴일이나 축제는 매년 11일씩 일찍 열린다. 라스 아스-사나(Ras as-Sana)는 이슬람력의 새해 첫날을 축하하는 것이고 모우리드 안-나비(Moulid an-Nabi)는 예언자 마호멧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으로 7, 8월경이다. 이런 축하 행사에는 도심 거리에서의 퍼레이드와 함께 불꽃놀이, 연회, 북치는 사람, 특별한 단과자 등이 모두 등장한다.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의 아홉번째 달 동안(현재는 1,2,3월 경) 열리는 행사로 이슬람력에서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이 달은 모하메드에게 코란이 계시되었으므로 신앙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매일 해지기 전까지는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는다. 라마단이 끝날 때(Eid al-Fitr)에는 축하의식과 잔치를 벌이며 단식을 깬다.
에이드 알-아드하(Eid al-Adhah)는 메카(Mecca)로의 순례 기간으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거리는 다양한 색깔의 등불로 장식되고 아이들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뛰어 논다. 각 마을에서 마흐말(Mahmal) 의식이 열리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여행을 위한 깔개와 수의를 얻는다. 이 행사는 4, 5월경에 열린다.

 

여행자 정보

비자:
보건위생 : 특별사항 없음
시차: 한국이 이집트보다 8시간 빠르다.
전압: 220V, 50 Hz
도량형: 미터제 사용(도량형 환산표-영문)
외래 관광객: 연 280만 명

 

 

경비 및 환전

통화: 이집트 파운드(Egyptian Pound)
환율: US$1 = E£3.39
일반 가격
 저렴한 현지 식사 : US$2-4
 레스토랑 식사: US$6-8
 저렴한 숙소: US$3-8
 중급 호텔 : US$40(더블)

 이집트 물가는 천차만별이다. 가장 싼 호텔이나 호스텔에 묵고 거리 행상인에게서 음식을 사 먹고 역사적 명소는 하루 한 군데만 가고 만원인 3등 열차를 타게 된다면 하루 US$10-15로도 지낼 수 있다. 이집트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돈을 쓰게 되는 것은 교통편과 관광지 입장료이다. 관광지 입장료는 최근 몇 년간 엄청나게 뛰어올랐다.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 입장료는 US$7가량 되며 최근 개장한 룩소르 근처 네페르타리(Nefertari) 묘의 입장료는 엄청나게 비싼 US$60이다.
 관광지에는 소매치기가 설치고 있으니 뒷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는 것은 피해야 한다. 잘 알려진 회사의 여행자 수표는 어디서든 환영받고 US 달러, 영국 파운드, 독일 마르크화 여행자 수표가 가장 무난하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비자(Visa), 마스터카드(MasterCard), JCB, 유로카드(Eurocards)는 카드 사용가능 표시가 붙어 있는 상점들과 호텔에서 쓸 수 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Banque Misr 및 Bank of Egypt의 지점에서 현금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레스토랑과 호텔에서는 12%의 봉사료가 붙고 5-7%의 판매세도 부과된다. 게다가 고급 숙박지에서는 1-4%의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하므로 중급 및 고급 호텔에서는 애초 이야기한 가격보다 23%의 세금이 더 붙은 계산서를 받을 수도 있다.
 요금흥정은 이집트에서는 생활의 일부이며 실제로 모든 것에 대해 협상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숙박, 길거리 가게에서의 점심식사, 나일강을 타고 내려갈 펠루카(felucca) 배 등 모든 것이 해당된다. 시장에서 지켜야 할 흥정의 몇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지불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하지 말라. 흥정을 시작하기 전에 진정한 가격을 따져보자. 시간을 충분히 들이고 재미있는 유흥으로 흥정을 즐기라(상인에게 차를 한 잔 얻어마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무엇이건 사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화내지는 않는다.

 

여행 시기

 어느 계절에 이집트를 여행하느냐의 문제는 어디를 가고 싶은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상 이집트와 룩소르를 계획한다면 여름(6월에서 8월)에는 불편할 정도로 더우므로 확실히 겨울이 최적기이다. 여름에는 지중해 연안으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겨울의 카이로는 상당히 추우므로 봄과 가을이 카이로 방문에 가장 좋은 때이다. 이상적으로는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까지가 해변의 인파에 시달리지도 않고 한여름 대낮의 열기도 피하면서 따뜻한 날씨를 즐길 수 있어 가장 좋은 여행 시기라 할 수 있다.

 

주의 사항

 1997년 9월 독일인 관광객 아홉 명이 카이로에서 총에 맞았다. 1997년 11월에는 67명이(그중 57명이 관광객이었다) 룩소르에서 테러리스트의 손에 살해당했다. 회교 원리주의 투쟁가들은 무바라크 정부에 대항하는 움직임으로 관광객을 계속 노리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움직임이 시작된 후 100여명의 관광객이 살해되었다. 이집트 관광청은 이집트는 다른 나라들 못지 않게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과 영국 당국은 자국민들에게 특히 룩소르를 피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관광객들에게 이집트인 여섯 명 중 한 명은 관광객들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주요 여행지

 카이로(Cairo)

 카이로는 1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집트의 중심지로 이집트적인 것의 양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흙으로 만든 집과 현대적인 높은 사무실 건물, 화려한 차와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뒤섞여 중세의 세계와 현대의 서구 세계가 혼재하는 곳이 카이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카이로에 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대략 1200만에서 1600만 사이로 추정되고 있으며 시내의 많은 불법 야영지와 슬럼가에만 500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 부족은 엄청나며 교통 체증도 끔찍하지만, 정부는 지하철을 개통하고 교외 위성도시를 건설하는 등 이러한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슬라믹 카이로(Islamic Cairo, 현재는 도시 다른 지역보다 이슬람적인 특징을 더 많이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는 오래된 중세 지구로, 그 주변을 거니는 것은 6,7세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다. 이 지역은 이집트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며 아마도 중동 전체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높을 것이다. 다브 알-아흐마르(Darb al-Ahmar)같은 구역은 좁은 골목길, 진흙 벽돌집, 음식 행상, 염소, 낙타, 당나귀로 가득하다. 어디건 모스크와 사원이 있고 공기 중에는 코를 찌르는 터메릭과 쿠민 냄새, 동물 냄새와 지저분한 냄새가 떠돈다. 이슬라믹 카이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이븐 툴룬(Ibn Tulun)모스크로, 9세기에 세워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에 속한다. 위대한 이슬람 성인인 이맘 아쉬-샤피(Imam ash-Shafi'i)의 대영묘도 있는데, 이 무덤은 이집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식 무덤이다. 장대한 중세 요새인 성은 700년간 이집트 권력의 중심지였다. 성 안에는 세 개의 모스크와 박물관이 몇 개 있다.
 원래 로마의 요새 도시로 세워진 콥틱 카이로(Coptic Cairo)는 이슬라믹 카이로보다 수백년 앞서 건설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 중 하나가 위치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 곳에 거주했던 콥트 기독교도에게만이 아니라 유태인과 이슬람 교도에게도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남아있는 바빌론 요새 유적으로는 서기98년에 세워진 탑이 있는데, 나일강의 흐름이 바뀌기 전에는 원래 이 탑에서 나일강 주요 항구를 굽어볼 수 있었다. 이 탑 아랫부분에 콥틱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300년에서 1000년 사이 이집트의 기독교 시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종교 예술과 세속 예술, 석조 제품, 나무 제품, 청동 제품, 필사본, 회화와 도기류 등 다양한 전시품들이 있다.
 大피라미드들이 있는 기자(Giza)는 나일강 서쪽 제방에 18km의 넓이로 펼쳐져 있다. 이 피라미드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며 매년 수많은 인파가 방문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이 그 앞에 서면 정말로 압도적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大피라미드는 대왕조의 흥망성쇠와 정복자들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스핑크스 및 다른 소규모 피라미드, 사원과 함께 평탄한 사막에 서 있다.
저렴한 여행자 숙박업소와 식당이 있는 지역은 여러 군데 있지만 카이로 도심으로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며 특히 미단 오라비(Midan Orabi)와 미단 타라 하브(Midan Talaat Harb)가 인기있는 지역이다.


 
룩소르(Luxor)

 룩소르는 고대 도시 테베(Thebes)가 있던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장대한 기념비적 건축과 그 훌륭한 보존 상태 덕에 이집트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수백년간 사람들은 룩소르,  카르낙(Karnak), 헤츠겝수트(Hetsgepsut), 람세스 2세 신전을 방문해 왔다. 나일강에는 카이로와 아스완 사이를 유람하는 힐튼 호텔과 쉐라톤 호텔의 사치스러운 배 말고도 펠루카 배와 오래된 짐배들이 오간다.
 파라오 아메노피스(Amenophis) 2세가 이전 테베시대의 신전터에 룩소르 신전을 건설하였으며, 투탄카문(Tutankhamun), 람세스 2세, 넥타네보(Nectanebo), 알렉산더 대왕, 여러 로마인 들은 여기에 개축공사를 했다. 1885년 이후 발굴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 카르낙(Karnak) 신전은 테베시대의 주요 신전으로 여러 신전이 연결되어 지어졌고 가장 큰 아문(Amun) 신전 구역, 남쪽의 무트(Mut) 신전 구역, 몬투(Montu) 신전 구역 등으로 나뉘어진다. 아문 구역과 몬투 구역은 한때 운하로 나일강까지 연결되어 축제 기간 동안 신성한 배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룩소르는 카이로에서 매일 운행되는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 갈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위대한 마케도니아인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를 정복한 후 이집트로 왔고 지중해 해안의 조그만 어촌 마을에 자신의 새로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해변까지 연결되어 있는 큰 광장인 미단 사드 자굴(Midan Saad Zaghoul)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한때 500,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한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으며 전성기에 이 도시는 과학, 철학, 지적 사상, 교육의 대단한 보고였다.
 그리스-로마 박물관(Graeco-Roman Museum)에는 기원전 3세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검은 화강암으로 된 장대한 아피스(Apis) 조각이 있는데, 아피스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소의 이름이다. 그 외에도 미이라, 석관, 도자기, 보석, 고대 태피스트리 등이 있다. 로마 원형대극장이 최근 재발견되었으며 이는 로마인들이 이집트에 지었던 유일한 원형대극장으로 보인다. 경기장 주변으로 흰 대리석 테라스가 13개 늘어서 있는데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발굴작업이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실제 땅을 파는 장소는 이제 극장 북쪽으로 조금 옮겨갔다.
 폼페이의 기둥(Pompei's Pillar)은 높이가 25m에 달하는 커다란 분홍색 화강암 기둥으로 둘레도 9m나 된다. 십자군들이 이집트에 왔을 때 이 기둥을 보고 폼페이의 것이라 믿었지만 사실 이 기둥은 아주 규모가 컸던 세라피움(Serapeum)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이 기둥은 297년 디오클레티안 황제를 위해 세라피움 중앙에 세워졌던 것이지만 1000년 후 이집트에 온 십자군들이 세라피움과 클레오파트라 도서관을 파괴하고 기둥만을 남겨놓았다. 콤 아쉬-슈콰파(Kom ash-Shuqqafa) 카타콤베는 이집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로마시대 묘지로 매장지역, 방, 복도의 세 구역으로 되어 있다. 기원후 2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300구 이상의 시체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조문객들이 장례 행사를 치르며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연회장도 있다.


 
포트 사이드(Port Said)

 지중해 연안 수에즈 운하의 북쪽 입구에 위치한 포트 사이드는 이집트 기준에서 보면 아주 젊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1859년 수에즈 운하 개착이 시작되면서 당시 통치자였던 사이드 파샤에 의해 건설되었다. 포트 사이드는 1956년 수에즈 위기 때, 그리고 1967년과 1973년의 이스라엘과의 전쟁 때 계속 폭격을 맞았는데, 재건되기는 했지만 그때 파괴된 부분이 아직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 도시는 만젤라(Manzela) 호수를 개간한 땅에 세워졌고 둑길로 본토와 연결된 지협에 위치해 있다. 페리가 만젤라 호수와 알-마타리야(Al-Matariyya) 사이를 오가고 운하를 건너 포트 푸아드(Fouad)까지 간다. 거대한 배들이 늘어서서 운하로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장관이다. 이집트의 다른 지중해 연안 항구와는 달리 포트 사이드는 태양과 바다를 찾아오는 국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많지는 않다. 해외 여행자들도 많지는 않지만, 세기를 넘긴 식민지 건축물, 다양한 박물관과 정원이 있는 포트 사이드는  이집트에서 특별한 여행지로 남을 것이다.


 
아스완(Aswan)

 아스완은 이집트 최남단 도시로, 오랫동안 아프리카 다른 나라로 가는 관문이었으며 고대 대상 루트의 교차점으로 번영했던 시장 도시였다. 이 도시는 북회귀선에서 멀지 않은, 나일강의 '다른' 한쪽 끝에 세워졌다. 고대에는 군대 주둔지인 순트(Sun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곳은 초기의 콥트 기독교도들에게도 의미있는 곳이었다. 나일강 가운데 엘레판틴(Elephantine) 섬이 있는데 그 곳에 순트의 주요 건물과 신전이 위치했었다(그 섬은 당시 예부(Yebu)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나중 그리스인들이 새로 이름을 지었다). 사원과 유적이 이집트 다른 지역과 비교해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거나 인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스완을 꼭 방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대규모의 상류 댐과 나세르(Nasser) 호수로부터 물이 내려오는 아스완 나일강의 장대함과 나일강에 해가 질 무렵 펠루카 배가 강을 따라 가는 광경은 어떤 여행지보다 감동적인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다크라 오아시스(Dakhla Oasis)

 무트(Mut)와 알-카스르(Al-Qasr)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다크라 오아시스는 카르가(Kharga) 오아시스에서 200km 가량 떨어져 있고, 파라프라(Farafra) 오아시스에서는 250km이상 떨어져 있다. 무트는 오래된 골목길과 진흙 벽돌의 집들이 비탈진 언덕에 즐비한 미궁같은 도시이다. 언덕 꼭대기에는 한 때 도시를 이루었던 오래된 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언덕에서 절벽, 사구, 사막을 배경으로 서 있는 중세 도시를 내려다보는 정경은 아주 환상적이다. 신시가지 중심으로 오래된 이슬람 묘지가 있으며, 마을 주변에는 유황 온천도 많다.
 근처의 알-카스르(Al-Qasr)는 오래된 작은 도시로 전통 건축물 대부분이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 중세적인 분위기는 좁고 지붕이 덮인 거리와(여름의 햇살과 사막의 모래폭풍으로부터 피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그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가축들로 인해 더 강조된다. 주택과 건물 대부분의 문 앞에는 상인방(문, 창 등의 위로 가로지른 나무)이 있고, 여기에는 건물을 지은 사람과 집주인의 이름, 날짜,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날짜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건물은 924년 세워진 것이다. 카이로에서 다크라(Dakhla)까지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닌다.


 
다합(Dahab)

 다합은 아카바(Aqaba) 만에 있는 샤름 알-셰이크(Sharm al-Sheikh)에서 85km북쪽, 시나이 반도 남쪽 끝 부근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한때 활기없고 침체된 곳이었지만 요즘은 대마초를 피우는 배낭여행자들이 베두인 족보다 더 많은, 일종의 게으른 낙오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지저분하고 값싼 숙박업소가 해변가에 많으며 값싼 레스토랑과 호텔도 많고 아카바 만에서 즐길 수 있는 수영과 스노클링이 근사하다. 버스는 다합과 샤름 엘-셰이크, 카이로, 수에즈 사이를 매일 운행한다.  


 
시디 압델 라흐만(Sidi Abdel Rahman)

 시디 압델 라흐만은 지중해 연안의 멋진 해안도시로, 지중해 해안의 다른 도시에는 많이 몰려드는 관광객 인파가 거의 없는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 훌륭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낙원같은 혼자만의 고립된 해변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도시는 베두인 유목민들의 중심지로, 이들은 이따금 근처의 마을에 모인다. 정부는 이러한 유목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유목민 중 많은 수가 정부에서 지어준 콘크리트 주택에 살기 위해 이동 생활양식을 포기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엘 알라메인(El Alamein)행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릴 수 있지만 오후 일찍부터 버스가 끊기는 경우도 많다.


 
마르사 알람(Marsa Alam)

 마르사 알람은 알 쿠세이르(Al-Quseir)에서 132km떨어진, 이집트 홍해 해안의 어촌 마을이다. 홍해 해안도로와, 에드푸(Edfu)에서 나일강변을 따라 230km 내륙으로 들어온 도로가 만나는 T자형 접합부에 위치하고 있다. 특이한 외양의 쇼핑센터, 학교, 전화회사가 하나씩 있는 것 외에 별 것은 없다. 이곳에서 수영과 스노클링을 즐기는 것은 근사한 경험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남쪽 해안 지역에는 지뢰가 묻혀있는 경우가 많고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는 경우마저 있기 때문이다. 마르사 알람보다 남쪽으로 가려면 카이로에서 발행하는 군대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아스완에서 마르사 알람을 경유하는 버스가 매일 있다.
 남서쪽 145km 정도 사막으로 들어가면 13세기 수피(Sufi)교의 주요 지도자였던 사이드 아쉬-사디리(Sayyid ash-Shadhili)의 무덤이 있다. 그의 무덤은 금세기 초 복원되었지만 가이드나 자세한 지도가 없으면 찾기 어렵다.

 

레저스포츠

 이집트의 지중해와 홍해 해안에는 수영하기에 좋은 해변들이 아주 많다. 다이빙과 스노클링은 이집트에서 아주 인기있고, 홍해는 세계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기에 가장 좋은 지역에 속한다. 이집트 바다에는 수중 생물이 많고 생생한 색깔과 모양의 산호, 갑각류, 어류도 많다.

 

이집트로 가는 길

 이집트 입국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카이로와 많은 유럽 도시들 간에는 연결 비행편도 많다. 유럽에서는 호텔 바우처가 포함되는 매우 저렴한 휴일 패키지도 많은데 비행기만 예약하는 것보다 쌀 수도 있고 만약 호텔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우처는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세계 각지에서 오는 이집트행 비행기는 싼 편은 아니므로, 일단 유럽으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유럽에서 이집트로 오는 편이 다른 지역에서 바로 오는 것보다 저렴할 수도 있다.  
 이집트의 국영 항공사는 이집트에어(EgyptAir)이며, 에어 시나이(Air Sinai)도 이집트로의 연결편이 많이 있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카이로를 통해 입국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룩소르, 아스완, 후르가다(Hurghada, 알 가르다카(Al-Ghardaka)라고도 불림), 샤름 엘-셰이크(Sharm el-Shiekh)로 입국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소규모 항공사가 이 지역 공항에 취항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이쪽 공항으로 직항편을 띄우는 전세기들도 있다.
 아프리카 및 중동지역에서 이집트로 오는 다른 교통수단으로는, 이스라엘에서 아카바 만을 지나거나 가자 스트립(Gaza Strip)을 지나오는 버스나,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에서 오는 페리가 있다.

 

국내 교통편

 이집트의 대중 교통수단 및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 시스템은 훌륭하다. 국내 항공여행은 돈이 많고 시간이 없을 때만 고려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확실히 여기저기 돌아보기에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 외 다른 교통수단으로는 버스, 기차, 배, 심지어 낙타, 당나귀, 말도 있다.
밀실 공포증이 있거나 멀미를 하는 사람은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버스나 기차 여행은 현지인들을 많이 만나고 현지 문화를 느껴 보는데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다. 버스는 사실상 이집트 모든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으며 5000km에 달하는 철도도 아스완에서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모든 도시를 연결해주고 있다. 아니면 승객들을 한 차 태우고 도시 사이를 오가는 서비스 택시를 탈 수도 있다. 이 경우 차량은 전통적으로는 푸조504s였지만 요즘은 도요다 미니버스가 많아지는 중이다. 이런 운송수단은 보통 기차나 버스 정류장에 늘어서 있다. 운전수는 차가 다 탈 때까지(정말로 꽉 찬다!) 기다렸다가 출발한다.